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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미국의 ‘친미 정권’ 세우기 정보전









미국 닉슨 부통령이 필리핀·베트남에서 대통령 선거 정보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CIA 랜스데일 요원(왼쪽)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바다신게임

냉전 시기는 어느 시대보다 큰 전쟁없이 조용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세계사의 어느 시기보다 미·소간 세력경쟁이 치열했다. 군대 동원 없이도 강제로 정권이 교체되고 안보정책이 변경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일선에 정보가 있었다. 냉전 시기 군대와 외교의 운신 폭이 좁아지자, 미·소는 정보 릴게임황금성 전을 통해 세력경쟁에 나섰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타국 대통령과 측근, 지식인과 언론 등을 포섭해 공산세력을 확대하자〈중앙SUNDAY 11월 8일자 25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선거를 통해 친미 정권을 세워 방어했다. 몰아치는 소련의 공세에 맞서 그렇게 대응했다.

두리틀 “더 교활한 방법으로 소련 격 릴박스 파해야” 결기는 오히려 소련을 능가했다. 소련 공세에 CIA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검토한 두리틀 보고서(Doolittle Report)가 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소련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세계 지배를 추구할 무자비한 적’이라고 규정한 후,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 민주적 규범을 뛰어넘어 “더 교활한 방법”으로 격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덜레스 CI 릴게임손오공 A 국장도 요원들에게 이 싸움에 신사도 정신은 없다며 소련을 능가하는 야성을 당부했다.
그 각오가 곧바로 나타난 것이 1953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였다. 당시 필리핀은 ‘민주주의 실험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민주주의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의 실정을 틈타 공산주의 후크(Huk) 반군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필리핀 야마토게임연타 민주주의가 위험을 맞고 있었다. 방치하면 아시아 민주주의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 미국은 강력한 민주주의 지도자를 세워 방어하기로 했다. 이 임무가 CIA에 떨어졌다.









막사이사이







CIA는 곧바로 심리 정보전의 마술사로 불린 에드워드 랜스데일을 필리핀에 보내 새로운 민주주의 지도자를 찾아 대통령에 당선시키라는 미션을 부여했다. 현지에 도착한 랜스데일은 필리핀 국방장관 라몬 막사이사이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후크 반군 토벌을 지휘하고 있는 그는 반군 기반인 농촌 마을을 직접 찾아 불만을 청취했다. 군복 대신 소박한 차림으로 민가에 앉아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청렴·강직한 데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그는 국민적 지도자로 손색이 없었다. 그때부터 랜스데일은 그의 개인 정치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우선 ‘필리핀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 이미지를 만드는데 진력했다. 신문·방송·전단지 등을 통해 키리노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집중 폭로하고 후크 반군의 위협을 과장해 부풀렸다. 이에 맞선 막사이사이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이미지와 민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 여론전이 효과를 보이자, 랜스데일팀은 막사이사이에게 야당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설득한 후 본격 선거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는 CIA본부의 측면지원도 받았다. 100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아 비밀캠프를 꾸리고, 연설문 작성·홍보물 제작 등 선거운동 전체를 이끌었다. 상대는 현직 대통령 키리노인 만큼 부정선거 방지를 위해 공정선거 국민운동(NAMFREL)을 조직해 시민 감시활동도 전개했다.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쳤다.
그 결과 막사이사이는 68.9%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 단기간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자질이 큰 요인이었지만 CIA의 선거 정보전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막사이사이도 사회정의를 다시 확립해 필리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사후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됐으며 오늘날까지 아시아의 대표적인 사회정의·민주주의 상으로 남아 있다. CIA의 대통령 만들기 정보전이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필리핀에서 성공한 CIA는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1954년 베트남도 공산세력 지배의 일보 직전에 서 있었다. 그해 제네바 협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베트남은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바오다이 황제가 다스리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됐다. 1956년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을 결정하기로 했으나 바오다이 황제의 무능으로 북베트남의 선거승리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이에 CIA는 또다시 랜스데일팀을 베트남에 보내 필리핀 신화를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응오 딘 지엠







베트남에 도착한 랜스데일팀은 필리핀 상황과 달라 난감했다. 무엇보다 미 정부가 남베트남의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운 가톨릭 지식인 응오 딘 지엠(이하 ‘지엠’)은 투철한 친미·반공 인사이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다. 이에 랜스데일팀은 지엠 띄우기부터 착수했다. 우선 워싱턴의 지원을 받아 지엠을 총리로 전격 임명해 일거에 지명도를 높였다. 이후 필리핀에서처럼 총력 여론전을 펼쳐 ‘베트남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지엠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 확대도 급선무였다. 랜스데일팀은 지엠이 가톨릭 신자라는 점을 이용해 가톨릭계를 움직이기로 했다.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이 북베트남 가톨릭 주민들을 남베트남으로 이주시켜 지엠의 정치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랜스데일팀은 교묘한 종교 심리전을 펼쳤다. ‘성모 마리아가 북쪽을 떠났다’ ‘그리스도가 남쪽으로 갔다’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북베트남의 가톨릭 박해가 임박했다는 공포도 퍼뜨렸다. 모두 가톨릭계의 자발적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으로 북베트남 가톨릭 인구의 60% 이상이 남쪽으로 이주해 지엠의 핵심 지지층이 됐다. 남베트남의 정치지형도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1955년 지엠의 대통령 선출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무려 98.2% 나왔다. CIA 선거 정보전이 또다시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지엠은 급속히 독재화됐다. 특히 반공을 내세워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이는 결국 1963년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지엠도 총살됐다. 이후 남베트남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져 패망했다. CIA가 남베트남의 민주주의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이외에도 CIA는 1953년 이란 총리 축출, 1954년 과테말라 대통령 축출, 1973년 칠레 군사쿠데타 배후 지원 등 다수의 정상교체 정보전을 펼쳤다.
이처럼 냉전기 미국도 소련처럼 정보기관을 내세워 타국에 대한 영향력을 거칠게 행사했다. 공산주의 봉쇄라는 단기 성과에 매몰돼 반미감정 확산, 도덕적 리더십 약화 등 장기적으로 전략적 역풍도 몰고 왔다. 오늘날 미국이 비밀 정보전 수행 시 이 같은 블로우백 역풍을 철저히 계산하는 것도 바로 이 교훈 때문이다.
비밀 정보전 첫 입법화…프랑스 등으로 확산 그러나 정보사(史)의 관점에서 보면 냉전기 미국의 영향력 정보전은 비밀 정보작전의 제도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무엇보다 피를 흘리는 전쟁 대신 정보를 통해 국가 정책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정보의 전략적 효용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비밀 영향력 정보전을 최초로 입법화한 것은 세계정보사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된다. ‘미 정부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다른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합법이라고 규정(50 U.S. Code § 3093)했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발각될 경우 책임을 피할 수 있도록 꼬리 자르기 각본을 미리 설계해 둔 것이다. 가령 CIA는 대통령에게 비밀 정보작전 보고 시 구체적 내용은 보고하지 않고 성공 여부만 보고했다. 후일 문제 발생 시 대통령이 “보고받지 못해 잘 모른다”고 그럴듯하게 부인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이를 ‘그럴듯한 부인 제도(plausible deniability)’라고 한다. 대통령이 정치·외교적 후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한 비밀 정보전을 승인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른 나라들도 비밀 영향력 정보전을 제도적으로 확립시켰다. 프랑스 정보기관인 대외안보총국(DGSE)이 세르비스 악시옹(Service Action, SA)이라는 특수부서를 만들어 국가가 공식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비밀공작을 전담토록 한 것도 이 연장선상이다. 오늘날 영향력 정보전이 현대 정보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 11월 18일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비밀 정보작전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역풍을 우려해 그간 극도로 자제해 왔던 정상교체 비밀 정보전의 재개 신호인지 주목된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